하얀제비를 기다리며

'아름다운 가게'에서

소세골이야기 2006. 8. 19. 00:00
 

한동안 밀쳐 모아둔 볼일꺼리를 주섬주섬 모아들고 제천을 나갔다.

늘 그렇듯이 비 오는 날 이여든, 무에든 급해져서야 서둘러 짬을 내보는 게 농사일 시작하고부터는 버릇 되었다.

쇼핑이랍시고 시장이고 슈퍼고 한갓지게 둘러보며 다니던 것이 언젯적 이야긴가 싶게 되었다.

오늘도 그랬다.  오후에 고추밭 영양제랑 목초 액 줄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

서둘러 돌아와야 될 터였다.

그래도 몇 가지 볼 일을 마치고선 아름다운 가게에 들를 수 있었다.

지난번 봐 두고 바빠 그냥 갔던 재봉틀은 그예 없었다.

아쉬웠다.

집엣 것은 오래되고 수동이라 자꾸 밑실이 들떠 바느질 한번 하려면 애 먹는데 ,모터가 달린 자동이라 올 가을 학습 발표회 때 남형이가 대금 열심히 연습해서 불게 되면 지난번 기독교 바자회에서 사다놓은 천으로 개량 한복 한 벌

만들어 주기로 한 약속 수월히 지킬 수 있었는데  .

그래도 작은 계량 저울 한개, 딸아이와 같이 입을 수 있는 속옷 몇 벌 고르고 옷 코너를 둘러보니 언 듯 카키 색 면 칠 부 바지 하나가 눈에 들었다.

민정이 에게 꼭 맞는 치수다.

이층에 올라갔다.

책 읽기를 금지했으니  책 코너는 외면하고  돌아 서는데 가비 얇은 하늘 색

 여름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.

걷기 연습이 이제 막 시작된 딸애의 발에 꼭 편할 듯싶었다. ~


···그땐 민정이가 함께 이 계단을 올라와 한 아름 책을 욕심껏 골랐는데....


그게 벌써 두 해전 여름이다

초등 5학년 한 해 여름을, 몇 해 아파 해오던 무릎 관절의 류마치스로 그예  걷지 못하던 딸아이가 그 겨울부터 걸음 연습을 시작해서 다음해 6학년 여름 건강 해진 기념으로 엄마를 따라 첫 쇼핑을 나왔던 것이.

그때 첫 장보기의 장소가 이곳 ‘아름다운 가게’였다.

민정이는 밤색 가죽 미니스커트와 같은 소재로 가운데 줄무늬가 들어간 청 베레모를 골라들고는 어쩔 줄 모르고 기뻐했다.

제가 좋아하는 청소년 드라마 반올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똑 같은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나? 그리 조잘거리며....  .

그리고도 이층에 올라가서는  책에 굶주린 아이처럼 한 아름 읽을거리를

뽑아 들었다.

그날 옷 몇 벌과 책 한 아름에, 머리 끈이며 자잘한 소지품들을 탐나는 데로 실컷 챙기고서 계산대를 거쳐 나오며 동그래진 딸아이의  눈.

엄마 지갑에선  천 원짜리 한줌밖엔 나가지 않았으니 .

‘우리 민정이 모처럼 외출인데  나가면 마음에 드는 옷도 한 벌 사고 좋아 하는 것들 오늘은 많이 사지’ 하면서 천 원짜리 몇 장 건네주는 아빠에게

야속해 하며 눈 흘기더니 이제 사 알았다는 듯 활짝 웃더니만.

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골 살림하며 농사꾼으로 살려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쓰는 버릇을 먼저 배워야 한다며 유럽 사람들은 어버이가 어려서 입던 옷을 간직했다가 결혼하고 자식을 놓으면 소중히 물려 줄 정도로 검소함이 몸에 밴 생활을 한다는 내 일장 연설에 그저 신 바람나

‘엄마  좋은 것들을 이렇게 싸게 잘 살 수 있는데 왜 비싼 물건들에 돈을 많이 써? 사람들은. 이거 오늘 쇼핑한거 기억 해 두었다가 나중에 아가모 글짓기에 써야지’ 하면서 들떠 있었다.


그러던 딸아이가 중학교 입학식에 씩씩하게 걸어 나가 선서를 하고

물 오른 나무처럼 쑥 쑥 자라더니 그 여름부터 다시 그 모진 아픔을 겪었다.


그로부터 일년 이제는 제법 몸도 충실 해 지고 숙녀 티가 나는 모습이 되었다.

그 오랜 아픔 끝에서 이제 다시 걷기 연습이 시작되었다.

오늘 사온 카키 색 바지가 몸에 꼭 맞았다.

하늘색 신발 리본 끈이 장식용으로 너무 길었다.

제 아버지가 잘라 간단하게 여며 주었다.

그 신발을 신고 ,아직 계단을 오르고 내리기 서툴러 몇 번 손을 잡더니

대문을 나서 집 앞  장 독 마당을 빙 둘러난 제법 긴 동네 길을 한바퀴 돌았다.

무릎도 아직  덜 펴지고 서툴지만 그래도 걸음걸이에 힘이 많이 올랐다.

아래 두 녀석은 괜스레 제 누나 뒤를 따르다 앞서다 강아지처럼 날뛴다.

모처럼 제 누나 걷는 모습에 저리 좋은가 보다.


문득 쳐다보니 저 너머 언덕 위 솔 막에서 느티할베가 내려다보고 있다.


하루아침 하루저녁도 거름 없이 딸아이의 머리맡을 , 그 몸을 보듬어 보살피는 제 아버지의 모습 아녀던가.

그 힘겹던 아픔 사루어 내리고 저리 발자국 떼기까지

제 아버지 가슴 저미며 ,때로 모질도록 ,바쁜 밭일에 물 먹은 솜 같이 곤하고 아파도 어느 아침 어느 저녁 변함없이 딸아이 그 곧고 예쁘던 건강한 모습 살려 일구느라 묵묵히 지켜 앉는 모습.

먼 날 오래 오래  딸아이 마음 깊이 제 아버지 모습 저 오랜 느티 할베의 장하고 큰 어깨로 버텨있으려니.

옛 이야기 하도록 딸아이 이제 곧 튼실히 물오르고 쭉 곧은 다리로 저 솔 막 언덕 느티 할베께를 제 아우 둘 함께 오르고 뛰어 내리리니.


딸아이 동구 밖 길을 한 바퀴 돌아 든 날 ,

마음이 아이의 첫 나들이 날처럼 맘 그들 먹 타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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