무너미 옛집에서

우리 동네 할메와 할베

소세골이야기 2006. 9. 2. 10:13

갈빛 바삭거리는 햇살 바른 겨울산 중턱에 산죽 몇그루가 여전히
그 푸르름을 간직코 있다.
그 앞에 은행나무의 벗은 몸이 장히도 하늘을 향해 뻗쳐있다.
그 산 자락아래 낡은 빈집하나 사이두고  두 노인이 살고 있다.
왼쪽 밤 골로 통하는 언덕베기 낡은 집은 문없는 마루가 바로 건너다
보인다.
머리 하얗게 쪽진 마르고 여윈 정님이 할메. 오늘 아침도
콜록거리며 밭은 기침 해대는 아들 밥 짓느라 새벽부터 마당을 오간다.
사나흘 전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가 누웠다 하시더니 그저 혼자둔
아들 못 미더워 그세 추슬러 일어나셨던가... .

집 나간 며느리 몇달만에 돌아 와 다시 사람 사는 모습인가 했더니
할메 치마꼬리 붙잡고 맴돌던 손녀딸 정님이 마저 데리고 다시떠난
겨울 바람 썰렁히 마룻장을 휘도는 집에 아들은 늘 일손 놓고
술에 절은 세월이 벗입네 하고, 할메는 늦가을 춥도록 남의밭에
마늘 심는 품팔고 콩떨어 아들 밥상차려줄 찬거리 사러 산길 느릿
오르내려 장터 마당을 오간다.

입성짧은 할메는 혼자 품 팔고 텃밭꺼리 일하며 살때는 군입거리
냉장고 쌓아놓고 오며 가며 잔 입성떼우며 외려 편했는데
서울살던 아들네 내려와 함께 살며서는 혼잣 입에 못 맞추니
먹는거도 불편타 하시면서도  일 서툴고 느려터진 아들 며느리 감싸
안고 그 살림 에우느라 늘 손에서 호밋 자루가 떠나잖고 밭둔덕에
업드려 허리 펼 날이 없다.

어느 날엔가는 아침마다 오는 막걸리 차를 놓쳤다고 노인 걸음이면
20분은 족한 길을 아랫동네 가게까지가서 아들 막걸리 두병을 사
안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다.

개미처럼 업드려 품팔고 밭일군 가을 걷이는 살림 씀씀이에만 길든
자식들 손에 거품처럼 흩어지고 동리 대동계 모임에선 갚아 버릴날
없는 빗 다시 내어 앞엣 것 갚는 살림살이, 해마다 사위고 굽어지느
니 정님 할메의 허리다.

할일도 많고 힘도 좋건만 젊은네들 손은 어이 그리 일이 어렵구
이젠 쉬어 자식 봉양 받아도 넉넉할 팔순앞둔 할메손에는 어이 일복
이 떠나잖는지... . 

늘 아랫길 오가는 쪽진 정님 할메의 작은 뒷모습이 겨울 바람앞에
더 안스럽다. 내년 봄도 그나마 밭일하실 기력이나 찾으실지?

정님이 할머니네 곁 낡은 빈집 두채 그 지나면 단단한 돌집
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흐르는 물길 위로 자리잡은 양지바른 그 집에는
이름 석자만 내면 대부분 아! 할, 할아버지 선생님이 한분 사신다.
글쓰는 사람들에게 참 독보적인 큰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 이시다.
이른 새벽 우리집 뒷 창과 마주 한지라 불키고 창문 열다 보면
앞서거니 뒤서거니 그집 창에도 불빛이 있다.
겨울어둠속에 아마 동네에서 가장 먼저 불빛이 켜지는 창이리라.
그 시간 부터 밤 늦도록 늘 책을 보시고 글을 쓰시고 그분 평생
해오신 공부와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.

건강과 여럿 일로 이곳에 내려와 사시는지 오래지만 그집에 사시는
것만 알뿐 모습을 뵈는 일이 없다.
늘 창문 너머로만 보이는 하늘과 산과 그리 사시는 모습이
스스로 새장속에 날아든 새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.
손과 발에 흙묻힘 없이 눈으로 마음으로 보는 자연의 세계...
그 분의 글 속의 자연도 그대로 종이위의 한꺼풀 유리 너머의 자연이
아닐까?

문득 산골 아낙에겐 흙무지랭이로 곯아드는 시름속 정님 할메의 삶이
맑고 고아한 하얀 모습의 글쓰는 큰 선생님의 삶보다 더 불쌍한거라
고 여겨지진 않는다.


..................................2000.             12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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